Rainbow Bible Class

신학자가 인생에서 만난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

 

 

류호준 교수를 과천에 있는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2시간 동안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성경 무지''성경 무시'. 백석대 신학대학원에서 25년간 신학을 가르치다가 지난해 은퇴한 류호준 교수는 한국교회 문제점을 두 가지로 말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성경학자 중 한 사람이다. 개역개정성경 감수위원을 지내고, 쉬운성경 시편·에스겔서와 바른성경 예언서 부분을 번역하는 등 성경 번역 분야 권위자로 활동했다.

 

신학이 상아탑에 머무르지 않고 교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고 믿는 그는, 평촌 무지개교회 담임 목회자로도 20년간 사역하고 지난해 조기 은퇴했다.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M.Div., Th.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박사 학위(Dr.Theol.)를 받았는데, 이는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일념에서 비롯했다.

 

설교집, 에세이집, 주석서 등 20권 넘게 책을 남긴 그는, 올해 2목회와신학2년간 연재한 '류호준 교수의 심중소회'교회에게 하고픈 말 -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를 향한 심중소회(두란노)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한국교회를 보며 고민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신학교와 교회에서 은퇴한 류호준 교수를 331일 과천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아버지에게 신앙 교육을 받은 어린 시절부터 신학자·목회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었다. 현재 한국교회에 대한 진단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손봉호·강영안 교수와 마찬가지로 카이퍼리안(Kuyperian) 전통에 속한 개혁파 신학자로서, 개혁파를 자칭하는 한국 보수 교회에서 외려 성경 무시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쓴 소리하기도 했다.

 

- 신앙을 어떻게 갖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던 것인가.

 

기독교 가정이었다. 집사였던 아버지는 버스를 운전하셨는데, 정규 운전사가 아닌 스페어 운전사였다. 자녀들을 데리고 열성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셨다. 수시로 가정에서 예배하고, 방학 때면 자녀들에게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으라고 하면서 훈련을 시키는 등 조금 별난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린 나는 힘들었지만, 다른 것을 전수하지 못해도 신앙은 전수하겠다는 아버지의 소박한 마음의 중심이 와 닿았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우리 가족이 4남매였는데, 방학 기간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완독해야 했다. 바깥에서 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학교보다 성경 읽기를 우선시해서, 개학 전날 성경 시험 봐서 합격하지 못하면 성경을 읽지 않은 것으로 보고 학교에 안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마지막 날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잠언이 유다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냐" 물으셨다. 이렇게 질문하실 때부터 속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틀릴 수도 있고 맞힐 수도 있는 것인데, 틀리면 성경을 안 읽은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다 읽은 상태였기 때문에 억지라고 느껴졌고 너무 억울했다. 나는 유다의 왕이라고 대답했고, 그날 곡소리가 났다.

 

심지어 '대속의 원리'라며 동생들이 잘못하면 장남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해서 동생 몫까지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성경 읽는 것 때문에 종아리에 피멍울이 가신 적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뭐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 아버지 마음을 알았고, 성경에도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글도 성경을 통해 배웠다. 아버지는 4~5살짜리를 앉히고 성경으로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셨다. 훗날 문학이나 글쓰기에 애정을 느끼게 된 것도 아버지와 성경 덕분이다.

 

- 올해 2월 출간한 교회에게 하고픈 말머리말에 나와 있는 어린 시절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아버지가 방학 때마다 한 달 내내 기도원 집회에 참석하게 했다고.

 

1960년대 초등학교 4~5학년 시절, 아버지는 방학이면 일을 멈추시고 가족들을 데리고 삼각산 제일기도원으로 가셨다. 한 달 내내 기도원 집회에 참석했다. 집회가 끝나면 철야 산 기도 훈련도 시켰다. 집회 때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부흥 강사들이 다 왔는데, 천차만별이었다. 강단을 왔다 갔다 하며 기차놀이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신현균 목사님과 조용히 성경만 강해하셨던 이병규 목사님이 대조적으로 떠오른다.

 

온갖 목사님들이 와서 설교하셨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너무 많더라. 잡스러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성경이 무슨 뜻인지 해석해 주기를 원했는데, 자기식대로 성경을 읽어 놓고는 자기 할 말만 하는 것이다. '목사님들이 왜 저러실까. 한글로만 봐도 이 뜻이 아닌데.' 의구심이 많이 생겼고, 때때로 화가 났다. 그때 '혹시라도 내가 목사가 되면 적어도 성경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안 되겠구나' 마음먹게 됐다.

 

- 열성적으로 신앙을 전수해 주려 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나는 중·고등학생 때 꿈이 수학여행을 가는 것일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백혈병으로 입원하셨기 때문이다.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결국 마흔두 살에,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온갖 고생을 하셨다. 생계를 위해 과천에서 봉천동까지 걸어가서 좌판으로 고추 장사를 하셨고, 우리 4남매는 신문지를 가져와서 펼친 다음 그것으로 봉투를 만들었다. 봉투 하나에 1원씩 받았으니 별로 생계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대였다. 내가 장남이었기에 가정을 돌봐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교에서는 기를 쓰고 공부했고, 실제로 공부를 잘했다. 당시 연세대·고려대 등록금이 10만 원이었고, 서울대 등록금은 5만 원 정도였다. 내가 충분히 들어갈 자격이 된다고 해서 서울대를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힘들고 좌절스러웠다. 세상 살 이유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여서, 마지막 수단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들과 어머니가 있었기에 참았다.

 

-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신앙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왔을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신앙이 단지 책상 앞의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 자기 재산으로 어려운 사람, 과부, 폐병 환자를 돌보셨다. 어떤 날은 폐병 앓는 환자를 집으로 데려와서 밥을 먹이셨다. 그러면 어머니가 싫어하셨다. 자식들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과천중앙교회가 내 모교회인데, 아버지는 교회를 창립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중학교 1~2학년 때 개울에서 모래를 파서 나르곤 했다. 예배당을 지으면서 헌신하셨는데, 결국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가 저렇게 신앙생활을 잘하셨는데 떠나시는 모습을 보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따져 묻지 않았겠나. '하나님, 왜 우리 가족만 광야에 내버려 두십니까?' 교회 목사들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다른 면이 있다. 세 가지 유명한 물음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why), 언제까지(how long), 어디에(where).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언제까지 이렇습니까?",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초등학교·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께서는 가정 예배를 인도하시면서 종종 길게 설교를 하셨다. 수많은 예배 가운데 들었던 숱한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잊히지 않고 계속 가슴에 남아 나를 지탱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37:25)." 하나님께서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신다는 것. 온갖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그 구절이 잊히지 않았다.

 

'의인'은 자기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 하나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 말씀이 그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우리 가정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애쓰신 신앙의 전수 덕분이었다. 목사가 되고 박사가 되는 등 이후의 모든 과정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폴 틸리히가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God beyond God)이라는 표현을 썼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그런데도 내가 오늘도 신뢰해야 하는 그 하나님을 내 마지막 순간까지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과정도 궁금하다.

 

처음부터 신학자나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신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 서울대 입시에 실패했을 때, 한 권사님이 찾아오셔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셨다. "아들이 아주 똑똑한데, 주의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가게 된 곳이 당시 4년제가 된 총신대였다. 1970년대 초 수석 장학생으로 4년 장학금을 받았는데, 등록해 놓고 재수하려 했다. 생전 듣지도 못한 학교라서 아주 우습게 생각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1학기 다니다가 그만뒀다.

 

다시 서울대에 들어가려고 대성학원에서 공부했는데, 학원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다. 고향 양평동에서 큰삼촌이 아이들을 모아 주신 덕분에 과외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부모들이 1~2개월 아이들을 보내다가, 내가 총신대 학생이라고 하니 슬금슬금 안 보내기 시작했다. 쓰라린 경험이었다. 학원을 3개월 다니다가 돈이 없어 다닐 수 없게 됐다. 결국 총신대에 전화했다. 교무처장이셨던 김득용 목사님이 왜 이제 연락했느냐고, 빨리 다시 오라고 하셨다.

 

총신에 돌아가서 잊을 수 없는 선생님들을 만났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손봉호 교수님이 철학을 가르치셨다. 처음 기독교 세계관을 접했고, 헤르만 도예베르트, 아브라함 카이퍼에 대해 들었다. "철학은 학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라 하신 말씀에 매료됐다. 좋은 영문학 선생님들도 있었다. 한국외대 부총장을 지내신 최종수 교수님, 연세대 조신권 교수님 등 예장합동 장로였던 분들이 헌신적으로 강의하셨다. 이분들이 내 인생을 바꿔 놓으셨다. 철학하는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영어는 원체 좋아했다.

 

내가 신대원을 다니던 1979~1980년 총신에서 난리가 났다(1979년 교권 다툼으로 총신대에 학내 분규가 일어났고, 분열이 일어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와 예장합신 교단이 세워진다 기자 주). 더 못 하겠다 싶어서 신대원을 그만두고 유학을 택했다. 개혁파와 관련 있는 곳이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이었고, 소속 교단에서 목사 안수도 받았다. 칼빈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면서 오하이오 톨레도에서 6년 목회했다. 제일 처음 낸 책이 히브리서 주석이었는데, 교인들을 가르치면서 나온 것이다. 성경을 더 자세히 공부해서 교인들에게 더 잘 풀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과정에서 신약학은 다 공부했지만, 구약은 방대해서 다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저 공부하면 평생 제대로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간 곳이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였다.

 

공부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자, 박사까지 마쳤으니 교수를 하라고 하더라. 그런데 신학교 강단에서 신학만 가르치니 영혼이 메마르고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신학은 교인들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상아탑에만 있어야 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게 내 지론이기도 해서 교회를 개척했다.

 

- 교수에다가 담임 목회까지 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인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컸다. 개척한 교회에서 20년 말씀을 전하며 교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때까지 책을 26권 냈는데, 설교하고 가르쳤던 내용을 쉽게 풀어낸 게 대부분이다. 개혁파에서 목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베푸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다. 배고픈 영혼에게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 영혼의 고향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목회는 다층적이다.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가난한 사람, 가난하지 않은 사람 등 온갖 종류의 교인이 다 있다. 그들을 하나님 자녀 삼아 요단강 선착장까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데려가야 하지 않겠나. 교인들을 깊이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기는 게 긍휼의 마음이다. 들판에 유리하는 양 떼를 보고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배고파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줘야 한다는 마음이 목회 생활을 지탱한 가장 큰 힘이었다.

 

사람들이 목회 철학이 뭐냐고 묻고는 하는데, 목회는 교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미국에서 목사로 초빙받았을 때부터 그렇게 답했다. 함께 살다 보면 교인들이 안다. 목사가 말을 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 인품을 본다. '우리 영혼을 저 목자에게 맡길 수 있다'고 하면 성공한 것 아니겠는가. 나는 미국 오하이오에서 6, 평촌에서 20년 목회했다. 매우 행복한 목사였다고 생각한다. 교인들과도 문제없이 지냈고, 교인들끼리도 신뢰했다.

 

- 평촌에서 20년 목회한 교회 이름이 무지개교회다. 이름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왜 그렇게 지었나.

 

성경학자로서 성경을 보면, 최초의 언약은 노아 언약이다. 인간을 심판했던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면서 징표로 삼은 것이 무지개 아닌가. 히브리어로 '케쉐트', 활이라는 뜻이다. 무지개는 말 그대로 하늘에 걸려 있는 활이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너희와 전쟁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무지개는 화살을 당긴 활 모양으로 돼 있다. 공중에 걸려 있는 활을 인간이 밑에서 당기면 하늘 끝에 있는 하나님이 맞지 않겠나. 하나님의 자기 저주다. 인간이 언약을 깨뜨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책임지신다는 의미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손 내미시고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 무지개에 담겨 있다. 하나님 은총의 표현이다. 'rainbow', 빛 가운데 나타난 활의 모습 아닌가.

 

처음부터 무지개교회는 아니었다. 과천 주사랑교회였는데, 교회당 건물을 구입해 평촌으로 옮기면서 교인들이 바꾸자고 제안했다. 왜 바꾸려고 하느냐 물었더니, 목사님께서 우리에게 무지개의 의미를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되묻더라.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여서 아무리 인간이 반역하고 배반할지라도 끝까지 책임지시고 지키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 20년 사역했던 교회를 지난해에 조기 은퇴했다.

 

학교에서 25년 가르치던 시점에 65세가 됐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날개 하나만 내리면 큰 사고가 난다. 같이 내려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른 이유는, 나이를 먹으니까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게 쉽지 않더라. 함께 교회를 시작했던 교인들도 다 60대가 넘었고, 세대를 봤을 때 물러날 때가 됐다고 느꼈다.

 

- 한국에는 개혁파를 추구하는 교회가 많지 않나. 개혁파 신학자로서 한국교회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한국에 제대로 된 개혁파가 있을까. 몇 년 전 한국에서 톰 라이트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나. 톰 라이트를 몹시 나쁘게 취급하던데 '개혁파'라고 하면서 적과 아군도 구분 못 한다. 한국에는 개혁파를 전유물로 삼는 특정 신학교만 존재하는 것 같다. 신학적으로 나는 카이퍼리안이다. 좁은 의미의 개혁파는 아니다.

 

진짜 개혁파는 성경을 맨 앞에, 그다음 신학을 놓는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신앙과 신학을 이신칭의와 같은 몇 가지 신학적 교리로 환원·축소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신칭의보다 앞서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신실성 아닌가. 한국에서는 신학을 한두 가지로 환원·축소해 개혁파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의 다양성과 신학의 풍부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십계명을 보면, 전반부(1~4계명)'하나님의 유일성'이 강조된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은 교회만 다스리지 않고 피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신다. 모든 피조물이 이 전체 다스림 속에서 평안하게 살기 원하신다. 그것이 '샬롬'이다. 십계명 후반부(5~10계명)'사회성'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신앙을 자기중심적으로 개인화·내면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회적 삼위일체'라는 말도 쓰지 않나. 삼위일체이신 세 분이 짝꿍이 돼서 망가진 세상을 새롭게 하는 회복 프로젝트를 펼치신다. 이것이 구원 사역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피조 세계 전체를 회복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사의 어느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제외될 한 치의 땅도 없다." 이것을 하나님나라 신학이라고 하는데, 나는 간혹 "프로 레게(Pro Rege)!"라고 라틴어 구호를 외치자고 한다. '왕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학문이든 경제든 이 땅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확대해야 할 영역이 아직 많다. 사방이 전선戰線이다. 하나님의 왕권(주권)을 강조하면서 당당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와 같은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을 성경을 통해 기를 수 있는데, 교인들은 성경에 무지하고 목회자들은 성경을 무시한다. 하나님 말씀의 무게에 압도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14:1)라고 했는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카보드'(하나님의 영광)라는 히브리어에 담긴 의미대로 하나님의 묵중한 무게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좋을 대로 하나님을 불러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성경-신학-'이라는 황금 삼각대(Golden Triangle)가 존재한다. 한국교회는 보수 교단일수록 셋 중 신학이 앞선다. 신학이 프레임이 돼서 교조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성경-신학-삶이라는 순서가 중요하다. 신학은 항상 성경으로 비판받고 조명되어야 한다. 한국의 신학 스펙트럼을 보면, 김재준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외려 진보 진영에서 성경 연구가 많이 됐다.

 

보수 진영일수록 조직신학이 앞선다. 신학적 잣대를 만들어 '옳다, 틀리다' 판단한다. 나도 여기 출신이지만, 성경을 덮어 놓고 "벌코프가 말했다", "박형룡이 말했다"고 하면 안 된다. 이사야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야 한다. 공부 안 하고, 아는 성경 몇 구절을 평생 우려먹는 목사가 적지 않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하다. 소름 끼치는 하나님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 단세포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더더욱 근본주의적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 평소 일상 에세이를 많이 쓰시는 편이다. 에세이를 보면 언어유희도 즐기시는 등 언어 감각을 중요시하는 듯하다. '일상''언어'의 문제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나.

 

언어 감각은 총신대에 다닐 때 영문학자 두 분에게 영향을 받았고, 미국 가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조직신학 교수이자 총장이었던 코넬리우스 플랜팅가에게 영향을 받았다. 이분 책은 한국에서 설교자의 서재·우리의 죄, 하나님의 샬롬(복있는사람)이 출간돼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C.S. 루이스, 필립 얀시, 프레드릭 비크너 책을 많이 읽었다. 얀시와 비크너는 내가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일반 작가 중에서는 애니 딜라드를 비롯해 문학 서적을 1980년대부터 꾸준히 읽어 왔다. 루이스가 언어의 마력과 매력, 깊이에 크게 감동받은 사람 아닌가. 살면 살수록 공감이 된다. 성경도 언어로 돼 있고, 글자마다 뉘앙스가 다르다. 언어는 제대로만 쓰면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나는 일상에서 하나님 현존의 손길을 접하고는 한다. 목사들이 신학 용어가 아니라 일상 언어로 성경을 해설하면 좋겠다. 한국교회 교인들을 보면, 삶의 패턴이 이분화한 것을 보게 된다. 뇌 구조가 칸막이처럼 나뉘어서, 주일은 이쪽, 평일은 저쪽에서 사고한다.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일상에서 주일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데도 문제를 못 느낀다. pie in the sky mentality. 하늘에서 맛있는 파이를 먹으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관없이 여기는 태도를 뜻한다. 이것이 극도화하면 '카카오톡 종교'에 매료되는 결과를 낳는다.

 

- 코로나19 상황을 보내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코로나19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문제다. 전 세계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인간의 손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고 있지 않나. 이 가운데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신앙을 돌이켜보고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은 애통하고 위로해야 하는 때다. 최근 올라온 톰 라이트 설교 영상을 봤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탄식하는 시편을 열거하면서, 이 점을 강조하더라. "지금은 애도할 시간입니다."

 

코로나19가 신의 재앙이니 자업자득이니 하는 온갖 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해서도 톰 라이트가 잘 대답했다. "이런 문제에 대답은 없습니다." 나는 애도·탄식과 더불어, 지금껏 무엇을 믿으면서 살아왔는지 물었으면 좋겠다. 모든 걸 다 빼앗긴 것 같은 자리에서, 다 빼앗겨도 마지막까지 나를 이끄는 자원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기회다.

 

우리는 시편 23장에 사는 사람들이다. 시편 22장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말이 나온다. 비참한 갈보리 이야기다. 시내산, 즉 율법의 저주로 비참하게 죽은 것을 의미한다. 24장은 프레드릭 헨델이 '문들아 너의 머리를 들라'에 담은 내용이다. 시온산 개선장군 이야기다. 시내산과 시온산 사이에 있는 것이 23장으로,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이다.

 

23장을 보면 푸른 초원도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고, 전쟁 이야기("원수의 목전에서")도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자리에서 24장을 향한 절대 희망을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 신앙이 이럴 때 빛나야 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전화상으로 서로를 적극 위로하기를 바란다. 요즘은 '거리 두기'를 더 친밀하게 할 수 있는 시기다.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는 게 교회 공동체의 일이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기고 극복할 것이라고 연대를 표하며 앞장서서 빛과 소금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출처: 뉴스앤조이] 노신학자가 인생에서 만난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532 

 

1] “올해 2월 출간한 교회에게 하고픈 말(두란노). 류호준 교수는 대학 시절 자신을 가르쳤고 미국에 유학 갈 때 추천사를 써 준 손봉호 교수에게 이 책을 헌정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2] “류호준 교수의 10대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그 시절 말씀 한 구절이 큰 버팀목이었다고 고백했다. 최근 6년 정도는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는데, 이 또한 이 세상에서의 훈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3] “류호준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 창시자이자 네덜란드 수상이었던 칼뱅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설립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손봉호·서철원·강영안·신국원 박사 등이 이 대학 출신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4] “류호준 교수는 20년 동안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를 거의 받지 않았고, 전별금도 거절했다. 교수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원칙을 세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5] “류 교수는 일상 속 관찰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인터뷰 도중 손으로 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면서, 아파트가 아닌 하늘에 주목해 보면 하늘이 땅으로 돌입하는 중요한 신학적 모티프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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